책 감사, 강의감사

진정한 리더라면 정조처럼

아리아리짱 2023. 2. 27. 06:31
(리더라면 정조처럼/ 김준혁 / 더봄)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를 통해 정조를 재조명할 기회를 가졌다. 조선 역사에는 큰 관심도 없었고 더군다나 사극은 잘 보지 않는다. 정조를 역임한 매력적인 배우 이준호가 역사공부까지 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조선의 문화를 가장 꽃 피웠던 영. 정조 시대 그리고 잦은 외세의 침략과 당파싸움으로 지난했던 백성들의 삶, 이것이 내가 아는 조선왕조의 단편적 지식이었다.
 
 의빈 성씨와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사극이  역사적 위치에서의 정조를 재조명하고 왕을 넘어 인간 정조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시작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사극 로맨스였다.
권좌의 보존에 연연한 무능한 왕들, 그저 권력다툼의 당파싸움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한 양반들, 평민이라도 끼니 걱정이 끊이지 않는 일반 백성들의 고달픈 삶, 신분의 세습으로 천형처럼 비천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노비나 천민의 삶, 그런 삶들 속에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는 조선. 그저 답답함을 더해 주는 것이 내가 아는 조선의 역사였다.
 
가뭄의 단비처럼 정조는 인간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왕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문화를 꽃피운 조선의 성군이었다.
역사상 가장 슬프고 참혹한  사건을 겪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둔 정조는 상처가 깊이 배어 있는 분이다.  난폭한 폭군이 될 요인을 품고 있음에도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하고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왕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이는 끝임 없는 스스로에 대한 단련과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테다.
 
문. 무를 겸비한 왕, 끝없는 반대세력의 생명의 위협에서도 꿋꿋이 견뎌내어 우리 문화를 찬란히 빛낸 정조의 치적은 끝없이 이어진다.
50개의 화살 중 49개를 명중하고 나머지 한 개는 인간적 겸허함으로 과녁 중심을 빗겨 나게 쏘는 신궁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이는 정조였다. 그의 모든 사고에는 '애민정신'이 바탕이었다. 그의 이상적 정치적 이념은 조선의 모든 노비를 없애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진취적이고 민주적인 것이다. 유교사상과 신분제도가 확실했던 당시에 이런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학문을 통해 갈고닦음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늘 책 읽기를 하고 실행했던 왕이었다. 
 
정조의 '신해통공'의 통공정책은 신해년에 이루어진 파격적인 정책으로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허가를 받은  금난전권의 독점권을 가진 몇몇의 상인들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기득권을 형성하고 부를 축적하여 권력을 집중시켰다. 백성 누구나가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부의 재분배에 기여할 수 있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제주에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죽어갈 때 유통업을 하던 여류 거상 '김만덕'은 개인 재산을 털어 제주 도민을 살려냈다. 그 공을 높이산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이에 김만덕은 육지를 통행해서 금강산 구경을 가고 싶다고 했다.  정조는 이를 허했다.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이 철저했던 당시의 제주 여성들은 육지를 향하기도 어려웠고 더군다나 금강산 구경은 성공한 남자들 만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이를 소원한 김만덕도 위인이고, 이를 허한 정조대왕 또한 파격적인 깨인 군주였기에 육지를 통해 금강산 구경을 허용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성에 대한 존중과 특혜였다고 한다. 
 
또한 정조와 정약용의 조합은 신뢰와 존중의 합이었다.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이  존재할 수 있었고,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의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원화성등 정조의 개혁정신을 꽃피울 수 있었다.
정조가 꿈꾸는 개혁도시인 수원화성 축조는 이 두 사람이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강제 동원이 아닌  화성을 축성하는 인부에게 정당한 급료를 지급해서 제대로 튼튼하게 짓게 하였다.  한 겨울에 기술자와 인부들에게 털모자를 선물하여 그들의 마음을 격려해 주는 등 인간미 넘치는 군주였다.
당시의 털모자는 돈 많은  양반들이나 쓸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어진 수원화성이었기에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는 역사적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화성의 4대문에 공사 실명판에 감독관, 정부 전. 현직 관리들, 기술자 편수이름을 나란히 새겨 평등하게 그들의 공을 치하하고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는 것 또한 정조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테다. 
 
정조대왕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가슴이 따뜻해진다. 우리에게 이런 왕이 이런 리더가 있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해진다.
개인으로서 자신의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을 위한 진정한 군주의 삶을 살아내 성군이 되었다는 것이 감동이다. 현대에서도 '진정한 리더로서의  삶이란 어떤 삶이어야 하나'에 대한 귀감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왕이다. 그의 삶 면면을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시간들이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정조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