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사, 강의감사

백기완의 심산상 수상 기사를 읽으며

아리아리짱 2020. 11. 5. 06:00

(경향신문 11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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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백기완의 심산상 수상

[경향신문] 심산 김창숙은 안중근·한용운과 함께 1879년생 동갑내기다.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나란히 받은 점도 같다. 안중근과 한용운이 각각 의병과 승려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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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은 자유 민주주의 수호와 통일운동에도 그 헌신이 크지만,  '우리말 으뜸 지킴이상'을 받으실 정도로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크신 분입니다.

저의 인사말 '아리아리'는 순 우리말로 힘내어 나아가자는 뜻입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상대방을 응원하는 기운을 담은 구호로, 콩글리쉬인 '파이팅' 대신에 기운을 북돋아주는 구호로 순우리말인 '아리아리'를 쓰자고 주창하시어 쓰게 되었습니다.

'아리아리'는 지난번 평창올림픽에서도 공식 응원 구호로 쓰였고, 일제 강점기 때 대한민국어 대사전 만들기의 한국어 사랑 영화 <말모이>에서도 응원의 구호로 쓰였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받은 심산상이 어떤 상인가 궁금해서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제도권의 상과 훈장을 일절 거부해온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산상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제정된 상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님에 대해서 잘 모르겠기에 네이버 지식 백과 자료를 간추려 보았습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정통 유학자 집안의 후손으로 "성현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모르면 가짜 선비이다."라고 하며 민족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선비가 아니라 그 문제 해결에 솔선수범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문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라, 우리 대한 제국은 1,300만 원의 국채를 지고 있는데 이를 보상할 국고가 없으므로 2천만 국민이 3개월 간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라고 하며 선국 단연 동맹회 성주 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선생은 성주 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 선생을 모신 청천 서원에 사립 성명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선생은 "이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즉각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통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학문을 닦으면서 서서히 우리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곧 너의 길이다"하고 하신 모친의 말씀을 듣고, 느낀 바 있어 이후 오직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 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 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 회의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라고 요구한 파리 장서를 만들어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고 해외 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며"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하였다.  "본적이 어디냐"는 일본 재판장에게 "나라가 없는 데 본적이 어디 있는가"라며 재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옥고를 치르며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었고, 출옥 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다.

광복 후 전국 유림 결속시켜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 대학을 재건하여 학장.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5월 10일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N 지식백과)

 

우리 선열들의 값진 투쟁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자유로운 것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백기완 선생님과 심산 김창숙 선생님 같은 분들의 뜻을 되새기며 우리 민족이 더불어 번영할 수 있도록 자유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향해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이전에 올렸던 백기완 선생님이 쓰신 순 우리말 창작 청소년 소설인 <버선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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