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감사합니다.

늘 고마운 그대 (1)

아리아리짱 2019. 3. 20. 07:14

  대신공원 입구의 수선화

남편은 작년 이 맘때 큰 수술을 했어요. 그 이후 저는 남편에 대한 소중함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 휴대폰에 '늘 고마운 그대'로 남편이 저장 되었구요.

남편은 5남1녀중 다섯번째로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아들이었어요. 작은 식당을 운영하시며 위의 형들과누나를 대학 공부 시키시는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보여 자청 해서 상고 진학을 했답니다.

당시 부산상고 갈 실력이면 웬만한 일반 대학을 갈 수 있는 우수한 실력인데 빨리 사회 생활을 시작 해서 어머니 짐을 덜어 주고 싶었답니다.

남편은 졸업 후 증권회사 근무를 시작하며, 직장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 된 후 대학준비를 시작했고, 그 입시학원에서 저와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둘 다 직장생활과 공부를 함께 해야하는 여유 없는 일상으로, 저는  별 다른 감정없이 그냥  마음씨 좋은 착한 아저씨를 보는 느낌 정도 였어요. 남편과 저는 5 살 차이였거든요.

저는 공부 후 바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지만, 남편은 중간관리자라서 학원 수업도 자주 빠지더니 대학 진학을 못하게 되었어요. 

그후 저는 직장 생활과 학교 생활을 병행 하는 바쁜 시간이 이어졌어요.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자신의 동기를 만날겸 저희 회사에 적금을 넣으러 왔어요. 자기네 회사에도 그런 금융 상품이 있을텐데, 아무튼 매달 적금도 넣고 친구랑도 만나고 가더라구요. 나중에 하는 말이 내가 잘 있나 궁금하기도 해서 매달 점검차 적금을 넣은 거라나요.

그렇게 저는 바쁜 대학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된 봄, 어느날 남편이  롯데 야구 시구전 하는날이라며 같이 야구 보러 가자고 전화를 했어요.  첫 데이트 신청인 셈인데, 그 날은 3월 14일 '화이트 데이'라 속으로 곰 같은 아저씨가 화이트 데이를 아는가 라고 궁금 했는데, 역시 그것은 우연일 뿐 그런 것은 모르더군요.

 사실 그날 저는 약간 망설였어요. 당시의 저는 데이트라면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전 군인 출신의 아버지가 엄격하다 못해 폭력적이서 엄마의 결혼 생활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결혼에 대한 계획도 없던 때 였어요. 더 공부해서 대학원을 가든지 회계사 자격증을 따면, 좀 더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 할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렇게 야구와 함께 시작된 우리 만남은 난타 기획자로 유명한 당시의 아이돌인 송승환의 < 일어나라 알버트>연극을 보고 나서 식사로 이어졌죠. 그 자리에서 저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제 생각을 얘기 하고, '나는 아직 나의 날개로 날고 싶다'고 하니까 남편이 '나의 둥지로 날아와 달라'고 하더라구요.

자기는 지난 1년동안 맞선도 몇 번 보기도 했는데  자꾸 제 생각이 나더라고 하면서, 마냥 어린친구라고 만 생각해 왔는데, 어느날 우연히 멀리서 제 모습을 보니 여자로 보이기 시작 했다고 했어요. 금융기관이 모여있던 중앙동에서 각자의 사무실이 멀지 않아서 가끔 마주치곤 했거든요. 자기가 내가 하고 싶은것을 도와주고 밀어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의 그 말에 저의 대답 또한 '엄마 한데 물어 볼께요' 였어요. 참 어리기도 했지만 남편이 싫지 않았던거죠.

한편 속으로는 깜짝 놀랐어요.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저와의 만남을 시작한 것과 그런 시적인 표현을 하는것에. 그런데 나중에 그런 멋진말을 한것도 잘 기억 못하더라구요. ㅋㅋ

당시 저의 월급은 동생들 학비에 요긴하게 보탬이 되었고, 보너스로는 저의 학비와 적금까지 가능할 정도라서 어머니에게 저는 힘이 되는 맏딸이었어요. 그런딸이 결혼하면 많이 아쉬울 텐데, 남편을 처음 인사 시킨 자리에서,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딱 저랑 닮았다라고 하시며 어머니는 교제를 허락 하셨어요.

그렇게 1년을 사귀다가 대학 3학년 때 결혼을 했습니다. 허니문 베이비로 첫아이를 임신하고, 1년 휴학하고 다시 복학 하는 과정에 남편은 약속대로 저를 응원하고 지원 해주었어요.  학비 지원은 물론 육아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물론 그후 저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남편도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쳤지만, 당시에는 본인은 아직 대학과정을 하지 않았을 때였는데도 이해심 많게 저를 뒷바라지 해 준걸 보면, 남편은 당시 다른 남자들에 비해 시대를 앞선, 깨어 있는 '페미니스트(feminist)'였던거죠. 

한편 지금 생각하면 남편은 투자의 귀재이기도 하구요. 투자 대비 회수율이 훨씬 컸으니까요. 2년의 투자에 제가 20년을 맞벌이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었으니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늘 고마운 그대 (3)  (8) 2019.03.22
늘 고마운 그대 (2)  (6) 2019.03.21
종교다원주의(pluralism)  (10) 2019.03.19
나의 영어사 (3)  (3) 2019.03.11
나의 영어사(2)  (9) 2019.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