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사, 강의감사

생각하는 인문학

아리아리짱 2019. 6. 21. 06:21

 

독서포럼 부산 큰솔나비에서 제가 처음 만난 책이 이지성작가의 <생각하는 인문학>(이지성/차이)입니다. 인문학 그것도 고전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쉽게 접근하기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져 왔어요. 독서모임에 함께 하니 힘겹게라도 접근방법이 보입니다. 처음 읽는 이지성 작가의 책은 저에게 고전 인문학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합니다. 그동안 숲의 나무사이에서 나무만 보아왔다면 전체 숲을 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게 됩니다. 

현재 우리 학교 교육, 공교육의 병폐는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되었어요. 조선시대까지는 인문학 교육이 바탕이 되었지만 식민교육은 인문학이 완벽히 배제된 ‘우민화 교육’의 시작 이었어요. 

패망한 일본 마지막 총독인 아베노부유키는 우리나라를 떠나며 다음의 말을 합니다. 

“일본이 패망했다고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조선이 위대하고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앞으로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 우리가 총,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보라. 조선은 진정 찬란하고 위대했다. 하지만 식민교육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일본 패망 후 잇달아 들어온 미군정은 총독부에서 일했던 한국인들을 내보내지 않고 미군정을 위해 바로 일할 것을 명했어요.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 그리고 한국 지도층인사500명과는 면담을 거절 한 채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된 겁니다. 독립투사를 고문했던 형사들은 그대로 고위간부가 되고 독립투사들을 감옥으로 보냈던 판검사들이 법원 최고위직에 오른 거죠. 사회 다른 분야도 마찬 가지고요. 친일 적폐청산이 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누적된 병폐들을 그대로 가지고 오게 된 원인입니다.

심지어 경성대에서 서울대학교로 바뀐 초대 총장에 미 해군 대위를 임명합니다. 한국교육에 대한 무례와 무식의 극치를 미군정은 ‘조선교육위원회’에 한국교육의 설계를 맡깁니다. 이들은 교육부 장관은 물론 전국 대학의 총장 교장, 교감을 임명하는 권한을 쥔 친일 반민족행위자 들이었고요. 

조선교육위원회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나라에 미국식 교육을 이식하는 것이었다.(중략) 위대한 리더들을 배출한 인문학 위주의 사립학교 교육이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와 직업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본뜬 교육, 즉 백인하류층과 흑인, 히스패닉 이민자와 아시아 이민자들을 사회 밑바닥에 영원히 묶어두고자 만들어진 공립학교 교육이었다. (15쪽) 

그러니 일본의 식민교육을 미국식 버전으로 바꾼 형태의 교육설계입니다. 조선교육위원회 위원들 그들 역시 식민지 시절 미국, 일본 등으로 유학 가서 인문학 위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의 자녀들 또한 인문학에 기반 둔 미국의 사립교육을 받게 하여 지배층으로 당연히 편입되게 합니다. 스스로들을 브라만쯤으로 여기고 말입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부자계급과 빈자의 계급을 고착화 시키는 교육의 힘, 그것도 인문학 교육의 힘을 알았던 것입니다. 

작가는 그들은 자신들을 조선 총독부 관리쯤으로 생각하고 국민은 새로운 통치 형태를 받는 식민지쯤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래서 우리나라의 지배계층과 정치인들은 국민을 가축 수준의 생각과 판단밖에 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가 봅니다. 그들의 뿌리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라.  

리더는 섬기는 사람이지 군림하는 사람이 아닐 지인데, 피지배계층의 생각과 사고를 마비시켜 지배계층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만연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식 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더욱 안타깝고요. 

그들의 우민화 교육은 성공했다. 초중고교와 대학 어디라도 좋다. 학교 현장에 가보라. 인류문명을 진보시키고 역사를 바꾼 원동력인 인문학적 대화와 치열한 사색, 위대한 깨달음은 찾을 수 없다. 나를 알고 나를 바로 세우고, 너와 우리를 알고 너와 우리를 바로 세우고, 나와 너와 우리가 하나 되어 공동체를 위대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교육 또한 찾기 힘들다. 죽은 지식의 강제적 주입, 맹목적 암기, 기계적 문제풀이, 친구와의 무의미한 무한경쟁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영혼이 병들고 마음이 파괴된다. 그리고 불행하고 나약하고 소극적인 20대가 되어 사회로 나온다. (16쪽) 

저자는 깨어있는 지배층은 깨어 있는 국민에게서 나오고, 타락한 지배계층은 잠들어 있는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깨어 있는 국민은 깨어 있는 인문학이 만들고, 잠들어 있는 국민은 타락한 인문학이 만든다. 깨어있는 인문학은 사랑을 목적 으로 하고, 타락한 인문학은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나눔과 사랑을 논하고 실천하는 인문학인가를 점검하라고 합니다. 

70년의 우리교육은

1. 일제의 식민지 교육

2. 공장노동자와 직업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계된 프러시아교육을 이어 받은 미국 공립 학교 교육

3. 친일파의 우민화교육

4. 군사정권의 독재교육 (45쪽) 

위의 네 가지 쓰레기 교육의 기반위에 만들어진 저질 회로의 사고기반을, 인문학에 기반을 둔 위대한 회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교육의 아주 미미한 부분을 담당해온 한 사람으로서 크게 공감합니다. 단어하나 외우기, 공식 하나 외우기의 결과 인 성적이 그리 중요 하지 않은데 그 안에서 헤매었고, 이렇게 큰 그림으로 미쳐 읽어 내지 못했습니다.  

독서와 사색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자기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고, 자기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실천 할 수 있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길은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문 고전을 제대로 읽는다면 허무와 좌절 대신 겸손과 행복을 만날 수 있다고 하고요. 인문학 공부 제대로 해 봐야겠습니다.  

‘인문학은 생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생각하라’는 읽고, 듣고, 토론하고, 관찰한 것을 토대로 문명을 개선하거나 창조하는 실천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라며, 작가는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순우리말 ‘생각하다’의 고어는 ‘괴다’이다.

‘괴다’는 ‘사랑하다’의 의미이다.

즉 ‘생각하다’는 ‘사랑하다’이다.

영어 ‘think'의 기원인 그리스어 ’노에시스‘는 철학,

즉 ‘필로소피아’를 의미한다.

필로소피아는 ‘지혜를 사랑하다’의 의미다.

즉 think는 사랑이다.

당신의 생각이 사랑으로 충만하길 빈다.

인문학의 목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8쪽)

 

본 것, 깨달은 것, 적용하기의 본.깨.적은 인문학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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