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할머니!

아리아리짱 2020. 5. 21. 06:02

 

(오월의 대신공원 계곡)

 

코로나 19 감염 억제를 위해 환기가 원활하도록 학원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수업을 하는데 한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마스크를 낀 연로하신 할머니는 약간은 주저하시며 "아프리카~" 뭐라고 하셨다. 나이가 아주 많고 말씀도 천천히 하셔서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몇 번을 '아프리카' 를 되풀이 하셨지만 수업 중이라 어서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할머니! 여기는 아이들  공부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학생들에게 방해되니 나가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할머니가 쉬 떠나시지 않고, '아프리카'가 있는데 하고 또 머뭇거리신다. 조금 편찮은 곳이 있는 어르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단호하게 할머니에게 나가 달라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아쉬워 하며 천천히 나가셨다. 

그러고 있으니 한 학생이 " 선생님, 저 할머니가  5층에서 손수레에 파프리카를 담아서 팔고 있었어요. 파프리카를 사라고 하시는데, 할머니를 그냥 보내시면..."

으응?  파프리카를 파신다고? 저는 분명 '아프리카'라고 들었는데, 할머니가 '파프리카'를 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한 번 '아프리카'라고 생각이 굳으니 내 귀에는 오직 '아프리카'로만 들렸던 것이다. 선입견의 무서움을 또 한 번 느꼈다.

미안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얼른 뛰어 나갔더니, 할머니가 엘리베이터도 이용하기 불편하신지 계단으로 손수레 카트를 밀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허리가 완전히 굽은 채로 위태로운 상태로 보였다. 얼른 내려가서 수레를 맞잡고 할머니께  " 할머니, 파프리카를 팔러 오셨어요?"라고 여쭈어보니, 그렇다고 하신다.  파프리카 한 상자가 손수레에 실려 있었는데 10 개 정도가 남아있었다.  파프리카는 싱싱해 보였지만 작고 모양이 조금 이상한 것도 섞여있었다.  할머니에게 얼마냐고 여쭈어 보니 몽땅 7천 원 달라고 하셨다. 봉지도  없으니 상자째로 가져가라고 하신다. 

가까이서 할머니를 뵈니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떠오른다. 어머님도 연세가 들어 허리가 많이 굽으셨고 체구가 많이 작아지셨다.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이 뭔가를 팔려고 다니시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젊어서 고생하셨으면 나이 들어서는 조금 편한 삶이 되어야 할 텐데...

할머니에게 얼른 돈을 드리고 상자째 가지고 계단을 오르니 할머니께서 "고마워요! 복 많이 받을 거요!" 하셨다. 차 한잔 값 정도를 지불하고 푸짐한  파프리카와 이렇게 큰 축복을 받다니, 오늘 정말 '해빙' 제대로 한 날이다.

교실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 선생님, 상자째로 사 오셨어요."  하며 눈이 휘둥그레 진다. " 응, 선생님이 파프리카 엄청 좋아하거든! 그리고 할머니가 '아프리카'라고 말씀하신 걸로 들어서 미안해서 다 사 왔어." 그러니 녀석들이 존경의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흠! 속으로 으쓱했다. 어쩐지 선생님이 그럴 분이 아닌데 할머니를 자꾸 나가라고만 해서 아이들은 마음이 좀 불편했다고 한다.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할머니와 아이들 모두 함께 마음이 참 훈훈해졌다. 이렇게 할머니로 인해 아이들과 또 하나의 추억을 쌓는다. '아프리카'가 아닌 '파프리카'로!       
< 나무와 숲의 해빙 노트 12일 차 >